강화군 초지진 초지돈대
신미년에 미국과 벌인 전쟁이라고 해서 '신미양요'라고 부르는 그 전투는 강화해협의 아래쪽인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에서 벌어졌다. 강화의 동쪽 바다인 '강화해협'은 '염하'라고도 불리워지는데 길이가 불과 20여km밖에 되지 않는다. 건너편인 김포와의 거리도 1km도 채 되지 않으니 바다라고 하기 보다는 강에 가깝다.
이 짧고 좁은 바다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진지들이 구축되었으니, 초지진도 그중의 하나다. 초지진은 강화의 12진보(鎭堡) 중 하나로 1656년(효종 7) 경기도 안산(安山)에 설치되었다가 1666년(현종 7)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가 있었다. 현대의 대대와 중대급 규모의 이 군사조직에는 그 규모에 따라 종3품의 첨절제사와 종4품의 만호, 종9품의 별장이 장수로 배치되었다. 초지진에는 방군 11명, 군관 19명, 토병 88명 등 총 118명이 배속 되어 있었다. 또 보유하고 있는 배도 3척에 달했다. 이로 살펴봤을 때 초지진의 규모는 상당했을 거로 추정된다.
* 신미양요와 초지진
초지진에는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가 속해 있었다. 세 돈대 모두 강화해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다. 그러나 돈대 앞의 갯벌을 메꿔 평야가 되자 섬암돈대와 장자평돈대는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성벽 돌은 제방 둑을 쌓는데 이용되었고 돈대는 버려져 있다시피 했다. 이후 두 돈대는 터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지진은 우리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프랑스 및 미국 함대와 싸웠고, 1875년(고종 12년)에는 연안을 마음대로 측량하고 다니던 일본 군함 운요호와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일명 강화도조약으로 불리기도 하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게 되었으며 그 뒤 우리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빠지는 불행한 역사를 겪기도 한다.
초지진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시아 함대의 포격으로 군기고와 화약고, 진사가 모두 파괴되었다. 그 후 복구하였으나 1875년에 일본 군함 운요호와 벌인 포격전으로 초지진은 다시 파괴되어 폐진 되었다. 초지돈대도 그때 파괴되어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 초지돈대, 초지진 되다
1973년 강화 전적지 정화사업 때 초지진 인근의 초지돈대가 복원되었고, 이를 초지진으로 불렀다. 실제의 초지진은 조선시대 고지도 등을 참조해 봤을 때 현재의 초지돈대보다 조금 더 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육군박물관이 초지진 터를 조사했을 때 초지돈대에서 북쪽으로 200m 떨어진 해안 언덕이 초지진 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초지진으로 불리는 초지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보장지처(임금이 피난하는 곳)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은 조선 조정에서는 강화도를 요새화 한다. 당시 병조판서 김석주의 주도로 강화 해안 98km를 따라 모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다.
돈대는 해안 감시 및 방어를 위한 군사 시설로 규모가 작은 성곽에 해당한다. 둘레가 약 110m~120m에 달하고 성벽의 높이도 4m 내외에 달할 정도의 돈대를 한두 개도 아니고 48개를 한꺼번에 만들었다. 1만500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석 달도 채 걸리지 않아 완공했으니 국가적인 대사업이었다.
초지돈대도 그때 만든 돈대 중의 하나다. 대개의 돈대들이 원형이나 네모난 모양인데 반해 초지돈대는 삼각형 모양이다. 땅 모양새를 따라 돈대를 축조했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 되었으리라. 한 변의 너비가 38m 내외이며 둘레는 114m에 달한다. 복원된 성벽의 높이는 4.2m나 된다.
* 역사를 증언하는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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