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김개남
동학혁명의 두 주역은 단연코 전봉준과 김개남이다. 이는 전주화약 후 전라도를 좌도·우도로 나누어 관리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둘의 정치적 지향과 혁명전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은 전라 좌도는 물론 경상 서남부까지를 아우른다. 김인배가 빛나는 활약을 펼친다. 아울러 향후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지리산에서 활약하는 포수들과 천민들을 모아 별동대 성격의 부대를 구성하기도 한다. 향촌 지식인으로 오히려 혁명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행동한 전략가로 읽히는 대목이다.
* 전술 차이
김학진은 …(중략)… 서울에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 송(宋) 사마(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들어가 봉준 등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였다. …(중략)… 봉준은 편지를 들고 …(중략)… 마침내 무리를 정돈하고 행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개남은 아예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197)
이렇듯 김개남은 전봉준과는 혁명 전술은 물론 정치적 지향도 달랐다. 아울러 한창이던 농사일이 잠시 뜸해진 7월 보름(음), 추수가 끝나는 추석 이후 재봉기할 것을 최초로 언급한다. 이에 전봉준 등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방법상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때 두령들을 따라 남원으로 모여든 군사가 7만 명이었다. 밖에서는 저 유명한 '남원대회'가 열리는 와중이다.
* 남원 상회(相會)
이런 김개남의 움직임으로 인해 전봉준이 남원으로 발길을 향한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청일전쟁 승자의 칼끝이 동학혁명군을 향할 것이니, 군사를 나눠 각 지역에 은신하며 전쟁 추이를 지켜보자 주장한다. 집강소 체제의 유지 명분이다.
이에 김개남은 "민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며 이를 반대한다. 다만 김개남도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보수하며 장기 농성태세를 갖춘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삼남 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척왜(斥倭)의 힘을 모으고, 아울러 전봉준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이런 차이가 분명 '남원상회(相會)'를 열게 된 계기였다. 김개남의 기질이랄까, 성정을 즉자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개남의 일련의 움직임으로, 동학혁명 지도부는 숙고에 들어간다. 남원상회다. 8월 말 전봉준 김개남 두 사람은 주변을 다 물리치고,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을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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