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 1910

<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

엑칼쌤 2024. 1. 1. 21:53

동학농민혁명 김개남

 

동학혁명의 두 주역은 단연코 전봉준과 김개남이다. 이는 전주화약 후 전라도를 좌도·우도로 나누어 관리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둘의 정치적 지향과 혁명전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을 전개해 나가는 전술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이는 전주성 점령 직후 드러난다. 홍계훈과 싸우기보다 서울 진격을 김개남은 주장한다. 또한 벼슬아치로 대표되는 지배집단을 철저히 적(賊 혹은 敵)으로 간주한다. 전주화약에서 전라감사로 부임한 김학진과의 협상 자체를 비판한 게 대표적이다.
전라도 거의 모든 지역에 집강소가 꾸려지고, 김개남은 임실을 거쳐 남원으로 간다. 하지만 전라 53주 중 나주, 남원, 운봉에는 집강소 설치가 어려웠다. 수령이나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군(民保軍)의 세력이 강한 탓이다. 김개남이 남원을 점령하는 과정을 동학사 '동학군과 경병(京兵)의 강화'에서 살펴보자.
한편 김개남은 3천 군사를 인솔하고 남원을 향해 진격하면서 남주송(南周松)을 선봉, 김중화(金重華)를 중군으로 삼아 바로 남원성을 공격하자 남원 부사가 관졸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나, 곧 성을 함락시키고 관아를 점령하여 부사 김용헌(金龍憲)을 잡아내 죄를 따지자 부사가 굽히지 않음으로 그 목을 베어 관문에 걸고 방문을 지어 시가에 붙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25에서 의역하여 인용)
항복하지 않는 적일망정 포로로 살려두는 게 통상적이다. 하지만 김개남은 그렇지 않았다. 동학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선전관 이주호 외 수행원 2명과 초토영 종사관 이효응과 배은환을 원평에서 처형한다. 그 실행자가 김개남이라는 말도 있다.

남원을 점령한 김개남은 전라 좌도는 물론 경상 서남부까지를 아우른다. 김인배가 빛나는 활약을 펼친다. 아울러 향후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지리산에서 활약하는 포수들과 천민들을 모아 별동대 성격의 부대를 구성하기도 한다. 향촌 지식인으로 오히려 혁명전략을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행동한 전략가로 읽히는 대목이다.

 

* 전술 차이

 
조선의 차병(借兵)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일본군도 따라 들어온다. 톈진조약으로 자기들끼리 약속이다. 흉계를 품은 일본은 6월 21일(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린다.

 

이 상황을 대비하고자 전라감사 김학진은 '관민상화(官民相和)'라는 명분을 내세워 집강소를 꾸린 동학군과 전라도 방어에 관한 협력을 모색한다. 전봉준은 이에 응한다. 당시 개화파를 협력대상자로 본 까닭이다. 하지만 김개남은 이 협상마저 비판하고 나선다. 복고주의자 황현이 쓴 오하기문은 그 폄훼하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엔 제격이다.
 
김학진은 …(중략)… 서울에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관 송(宋) 사마(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에 들어가 봉준 등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였다. …(중략)… 봉준은 편지를 들고 …(중략)… 마침내 무리를 정돈하고 행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개남은 아예 따르지 않고 자신의 부대를 거느리고… (번역 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5. p197)
 
이렇듯 김개남은 전봉준과는 혁명 전술은 물론 정치적 지향도 달랐다. 아울러 한창이던 농사일이 잠시 뜸해진 7월 보름(음), 추수가 끝나는 추석 이후 재봉기할 것을 최초로 언급한다. 이에 전봉준 등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방법상 차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때 두령들을 따라 남원으로 모여든 군사가 7만 명이었다. 밖에서는 저 유명한 '남원대회'가 열리는 와중이다.
 
하지만 김개남은 포수부대와 천민 부대를 보강하며 세력을 지속 확산해 나간다. 농민 위주 혁명군의 정신을 무장시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정치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방법이다. 8월 19일(음) 남원 교룡산성을 장악하고 병기고를 털어 무기를 보강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발한다.

 

* 남원 상회(相會)

 

이런 김개남의 움직임으로 인해 전봉준이 남원으로 발길을 향한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청일전쟁 승자의 칼끝이 동학혁명군을 향할 것이니, 군사를 나눠 각 지역에 은신하며 전쟁 추이를 지켜보자 주장한다. 집강소 체제의 유지 명분이다.

 

이에 김개남은 "민중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이기 어렵다"며 이를 반대한다. 다만 김개남도 남원성과 교룡산성을 보수하며 장기 농성태세를 갖춘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삼남 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척왜(斥倭)의 힘을 모으고, 아울러 전봉준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행위였다. 이런 차이가 분명 '남원상회(相會)'를 열게 된 계기였다. 김개남의 기질이랄까, 성정을 즉자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개남의 일련의 움직임으로, 동학혁명 지도부는 숙고에 들어간다. 남원상회다. 8월 말 전봉준 김개남 두 사람은 주변을 다 물리치고, 비밀리 상의하며 혹은 언쟁을 혹은 합의해 가며 주야 8일간 격론을 벌였다고 '남원 동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회합의 결론이 바로 재봉기였다. 그동안 정세를 관망하겠다던 전봉준 태도가 이 회합 후 급변하게 된 사실에서 남원상회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추석이 지난 9월 8일(음)부터 전봉준도 재봉기 준비를 서두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중의 지성은 늘 현명하다.
붙잡혀 재판도 없이 전주에서 참형 당해 자세한 기록도 없다. 그런 이유로 그에 대한 평가는 일정부분 왜곡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