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고려시대

< 강화 화개산성 >

엑칼쌤 2010. 4. 12. 10:01

강화 화개산성

 

 

강화 북동쪽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화개산(해발 260m) 정상에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 같이 산성이 사람을 부른다.





◇ 교동도 화개산성 정상
 
이곳에는 고려시대 산성으로 추정되는 석성이 산 정상에 너부러져 있다. 4월이면 산성 구경진달래구경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교동면사무소에서 화개산 등산로가 나있어 쉽게 갈수 있는 곳이다. 산행은 대체로 평탄하지만 가끔 암벽도 만난다. 산등성이에 오르면 사면이 바다다. 북쪽바다 끝에는 북한의 연백평야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황해도 개풍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은 가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며 섬 끝에 망향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 망향대보다 더 높은 산성으로 올라와 두고 온 고향을 바라보는 이가 적지 않다.

화개산성의 초기축성은 기록이 없다. 다만〔세종실록 지리지〕에 둘레 1,878m,
성안에 우물과 연못이 각각 1개소가 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 용도 아래 성벽
 
2000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내용은 전체 둘레가 2,168m의 포곡식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다고 조사했다. 외성은 내성보다 둘레가 조금 크지만 성벽은 대부분 무너진 채로 성줄기를 남겼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북쪽성벽은 멸실된 채 흔적이 없다. 외성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선조 24년(1591) 산 아래 고구리 고읍성을 축조할 때 외성의 성벽을 철거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1.013m다. 내성은 화개산 정상을 중심에 두고 쌓았다. 남쪽은 200m의 절벽이 자연성벽이고. 절벽이 끝나는 지점부터 북쪽능선을 타고 성벽이 이어졌는데, 용도같이 길게 뻗은 것이 보인다. 화개산성에서 성벽이 가장 온전한 곳이다. 용도 끝에는 망루자리가 확인된다. 정상에서 서쪽 산줄기를 타고 300m 정도가면 화개산 봉수터가 있다. 사방이 조망되는 군사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자리다.




◇ 북동쪽 성벽
 
성문지는 서쪽에 하나 흔적이 있고 나머지는 찾기 어렵다. 무너진 북쪽성벽 중간쯤에 우물터가 있는데, 등산객들에게 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다.

교동은 고려, 조선에 걸려 각 왕조의 수도였던 송도와 한양의 관문역할을 했던 곳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는 14회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조선인조 때는 통어영을 설치하고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의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다. 읍내리에는 지금도 인조 때 쌓은 교동읍성의 육중한 홍예문이 고색 짙게 남아있다. 중정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유배돼 죽음을 맞이한 곳도 이 읍성이다.

산성에는 애절한 전설도 있다. 약수터에서 산성 가는 길에서 만나는 민묘에는 세상을 뜬 아버지께 못다 한 효를 풀기위해 아들이 매일같이 성묘를 갔는데 묘 앞에 손자국, 무릅자국, 갓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마을사람들은 효자묘라고 부르고 있다.




◇ 화개산 봉수에서 본 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