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
1990년 8월2일은 걸프전, 일명 1차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1990년 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의 표면상 이유는 석유에 있었다. 당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의 국경지대에 놓인 쿠메일라 유전지대를 놓고 소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이 발생했다. 가뜩이나 쿠웨이트의 원유물량 과잉공급에 유가 하락으로 경제난이 심해지자 30만 병력을 동원해 쿠웨이트를 기습공격, 점령한 것.
전쟁의 실제 원인은 이런 표면상의 이유와 함께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이라크는 1980년 발발한 이후 무려 8년간이나 지속됐던 이란-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이를 완화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양국은 거부한 상태였다.
이라크와 쿠웨이트 양국의 오랜 앙금도 작용했다. 이라크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서 독립한 당시,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공식적으로 분할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쿠웨이트를 통치했던 사바 가문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겠다고 비밀협정을 요청했고, 영국은 이를 받아들여 1922년,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분할해 국경선을 획정해버렸다.
이후 1961년, 영국이 쿠웨이트를 완전히 독립시켜 주면서 독립 쿠웨이트 왕국이 탄생하자 이라크에서는 쿠웨이트가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보내려했다. 이에 쿠웨이트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해 영국이 항공모함까지 보내자 결국 이라크가 물러섰던 일이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문제로 이라크에서는 쿠웨이트를 되찾아야한다는 의식이 상당부분 퍼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같은 이런저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발발한 전쟁은 급속도로 전개됐다. 초반에는 이라크군이 30만 대군을 일시에 투입한 총공세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전혀 준비가 안돼있던 쿠웨이트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대패했다. 더구나 숫자도 3만에 불과했던 터라 쿠웨이트군은 각개격파당했고, 왕궁인 다스만 궁까지 포위했다. 이때 쿠웨이트군 사령관이던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가족들을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시킨 후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남은 쿠웨이트인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이라크군은 무자비하게 진압에 나섰고 많은 쿠웨이트인들이 살해되고 고문당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한 쿠웨이트 왕가는 망명정부를 수립했고,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가국은 대 이라크 유엔(UN) 결의안을 통과시킨 후 강력한 응징을 결의했다. 유엔 안보리는 1991년 1월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한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 68만명이 페르시아만 일대에 집결했다. 실제 공격은 철군시한을 이틀 지난 1991년 1월17일부터 시작됐으며 당시 작전명은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미국은 강력한 공군력을 이용해 이라크 전역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키고 발전소, 군 지휘부, 통신시설, 생화학무기 공장들을 중심으로 타격해나갔다. 39일에 걸친 대대적인 공습으로 육상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라크군은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렀다. 이라크군은 스커드미사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국을 보복공격하며 전쟁을 확대코자 했지만 이 스커드미사일들도 대부분 요격되거나 파괴됐다.
이어 1991년 2월24일부터 시작된 지상전은 그야말로 학살전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기하던 다국적군 지상병력은 곧바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했으며, 이에 퇴각하던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는 거의 섬멸당했다. 지상전을 벌인지 100시간 만인 2월28일, 미국은 전쟁종식을 선언했다. 이라크군은 전체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박살났고 2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냈다. 이에 비해 다국적군 사망자는 378명에 그쳤고 이중 미군은 150명이 전사했다. 최첨단 무기 앞에서 재래식 병력의 숫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완벽하게 증명된 셈이다.
걸프전의 결과는 단순히 이라크의 몰락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본 제3세계 국가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줬다. 특히 과거 게릴라전 위주의 전략을 중시하던 중국이 본격적으로 군 현대화에 나서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 열강들을 비롯해 각국이 앞다퉈 최첨단 병기와 최신예 전투기 개발과 구매에 앞장서게 된 것도 걸프전으로 인한 전쟁 패러다임의 변화가 준 측면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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