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이를 동서로 장악한 '돌궐 제국'
* 튀르크-세상에서 가장 넓은 언어권
천산산맥 동단의 튀르크 부족 6세기 중반 화북의 혼란을 이용 유라시아 전역을 손에 넣는다 몽골보다 앞선 제국의 형성이다
6세기 중반에서 8세기 중반까지 튀르크(푸른 돌궐) 200년 역사는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유라시아의 인구지도를 오늘날과 비슷하게 만든 첫 주인공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정치체가 알타이의 동서를 동시에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히말라야와 파미르고원이 정주세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듯 알타이산맥은 그동안 유목세계를 동서로 나누고 시베리아의 수렵채집민과 남부의 초원유목민을 나누는 기후의 구분선이었다. 심지어 몽골 제국 시절에도, 차가타이와 주치와 칸 울루스가 알타이산맥을 경계로 나누어 각각 다스렸다. 그 덕에 정치체로서 돌궐은 기존의 유목정권보다 복잡하다. 지중해를 사이에 둔 대제국 로마가 이미 동서의 전선을 모두 관리하다 기진맥진했던 것처럼, 산맥의 동서를 관리하자면 물론 훨씬 많은 자원과 복잡한 관리 방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천산산맥 동단에서 발원한 튀르크라는 자그마한 부족이 그 이름하에 태평양에서 카스피에 이르는 거대한 초원벨트를 하나로 묶은 것과, 그 유산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수염이 더부룩하고 좁고 긴 얼굴을 한 터키 공화국 사람들부터 중앙아시아 거의 대부분의 인구는 물론 매끈한 피부에 북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야쿠츠크인들까지, 지중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튀르크인은 거대한 띠를 이뤄 퍼져 산다. 그들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해서 유라시아 거의 전역에 깊고 넓게 뿌리를 내렸기에, 몽골 역시 튀르크 세계로 들어가면 대개 튀르크가 되고 말았다. 또한 사얀산맥에서 레나강까지 뻗어 있는 불교도 튀르크, 이르티시에서 지중해까지 자리 잡은 무슬림 튀르크들이 쓰는 말은 여전히 귀를 기울이면 서로 통하는 튀르크 방언들이다. 튀르크 세계가 그렇게 커진 일차 원인은 유목 이동이었고, 그들은 꼭 인도-유럽인이 그랬던 것처럼 동서로 움직이며 튀르크어를 심었다. 언어적으로 튀르크어 권역에 비견될 짝은 오직 인도-유럽어 권역뿐이지만, 그것은 16세기 러시아의 서진이라는 단 한번의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뿌리는 한참 얕다. 몽골 제국 출현 수백년 이전에 튀르크는 이미 세계화를 위한 주추를 놓았던 셈이다. 그래서 튀르크와 몽골 중 누가 더 세계를 크게 바꾸었는가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조심스레 전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 돌궐의 부상과 유지의 어려움
돌궐은 초원에서 유연을 어렵게 힘으로 대체했지만, 유연과 달리 6세기 중후반 화북이 주(북주·北周)와 제(북제·北齊)로 양단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순식간에 커질 수 있었다. 화북의 양국이 각자 막대한 비단을 바쳐가며 돌궐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를 이은 통일왕조 수당(隋唐)의 지배자들은 선비족의 피를 상당히 받은 인사들로서 북방을 다루는 데 대단히 익숙한 이들이었다. 음모로 집권한 수문제 양견은 이간질의 달인이었고, 당의 실질적인 창건자 이세민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두 선비인으로서, 중원 정치판의 의뭉스러움과 선비인의 강단을 갖춘 무력 군주였다. 서남방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르미즈드 4세는 ‘튀르크의 아들’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로 모계가 튀르크(카자르 혹은 돌궐)였고, 그의 사령관 바흐람 추빈은 588년 돌궐의 바가 칸과 돌궐 방식의 기병전을 벌여 칸을 죽인 명장이었다. 그들은 돌궐에게 비단 교역권을 순순히 넘길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돌궐의 사절을 모욕하고 교역을 거부하는 강수를 두었다. 돌궐은 이 어려움을 뚫고 알타이의 동서를 완전히 장악한 제국으로 거듭났다.
정치사적으로 돌궐(突厥) 출현 이후 유목정권과 비잔틴-페르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남방 정주세력권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양자는 이미 서로를 너무 깊이 알고 있었기에, 얕은 담장을 넘어가는 포도 넝쿨처럼 뿌리는 이쪽에 있고 열매는 저쪽에서 열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목정권은 정주세계를 다스리는 법을 알았고, 정주정권도 힘만 있으면 경계를 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늘 충돌했지만 사신과 상인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고,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듯이 가까워지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동서남북의 교류를 통해 역사의 인과율이 서서히 법칙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맹자-순자를 통해 중국에서 문서로 확고하게 정리된 ‘선정(善政)’의 정치사상은 초원에도 사실상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사람을 많이 확보하는 쪽이 승기를 잡게 되며, 사람을 얻는 길은 오직 생명-생업-이익의 기반을 차례로 안정시키는 것이며, 그 순서를 바꾸면 즉시 혼란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돌궐 제1제국의 멸망(630년)은 물론 카프칸 카간(~716년) 말기 2제국의 쇠퇴는 이 법칙의 엄연함을 웅변한다. 풀밭이든 밀밭이든 그때는 여전히 땅에 의존하고 살던 시절이었고, 지력은 잠깐 사이에 좋고 나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력이 한계를 넘으면 정주든 유목이든 혼돈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은 엄연한 법칙이었다. 물론 상업이 있었지만, 상품은 정주세계의 제한된 생산 조건하에서 나왔고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흐름이 끊길 수 있었다. 돌궐은 남방의 수나 당보다 더욱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했는데, 생산력의 제약하에 1) 예하 유목 부락민과 추장의 이익 2) 카간의 권위와 행정력 3) 제국에 봉사하는 상인-관료들의 이익 4) 고비사막 남부 농민들의 귀속감 5) 중국-페르시아-비잔틴과 동시에 이뤄지는 외교관계를 함께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상호 의존적이어서, 그 다섯의 조합은 정주세계의 경우보다 오히려 복잡했다.
* 싸움의 법칙-많이 싸우는 이가 진다
정복 국가는 ‘들판’을 태운다.
그러나 더 태울 들판이 없으면 붕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정복 정권이 실패하는 이유는 복잡하지만 일어나는 동력은 간단하다. 들판을 태우는 불길처럼 파괴 자체가 동력이기 때문이다. 파괴의 시기에는 뺏으면 내 것이 된다. 불길이 바다나 사막에 막혀 더 태울 것이 없더라도, 불타버린 자리에서 무성한 새싹이 돋아나므로 한동안 얻을 것이 있다. 사실 불이 꺼진 직후, 주인 없는 벌판에서 가축을 풀고 추수할 때 정복 집단은 운명의 전성기에 달한다. 그러나 다시 안정이 찾아와 더 태울 들판이 없어지면 균형과 안정 없이는 붕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돌궐은 당나라의 혼란을 틈타 공격하나 예봉이 꺾이고, 일릭카간은 군사를 되돌린다
이세민을 적수로 맞은 일릭(詰利)카간은 이 원리를 터득하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조급했던 듯하다. 626년 현무문(玄武門)의 난을 통해 형제를 죽이고 이세민이 권력을 잡자, 돌궐에 의부하던 한인 군벌 양사도(梁師都)는 당장 돌궐의 일릭카간을 부추겼고, 카간은 대군을 데리고 내려와 장안을 위협했다. 하지만 상대의 내란을 틈타 성급하게 내려온 무리들은 이미 한 차례 당군의 반격을 맞아 패하고 1000여명이 죽어 예봉이 꺾였다. <자치통감>에는 이세민이 위협하는 돌궐의 사자를 준엄하게 꾸짖고 가둬버렸다고 한다.
“나는 그대의 칸과 얼굴을 맞대고 화친을 맺어, 전후로 준 금백(金帛)이 셀 수가 없다. 그대의 카간은 스스로 맹약을 어기고, 군대를 이끌고 깊이 들어왔으니 내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대는 비록 융적이나 역시 사람의 마음이 있을 터, 어찌 커다란 은덕을 깡그리 잊고 스스로 힘을 과시하는가? 내 당장 먼저 그대를 베겠다.”
이세민이 위수 남쪽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위수 남쪽에 서니 돌궐의 수령들이 칸을 강 건너에 두고 그에게 와서 인사를 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는 돌궐의 수령들이 이익을 바랄 뿐 일심하여 싸울 마음이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세민이 6기를 이끌고 위수를 사이에 두고, 화친의 맹약을 어겼다고 일릭카간을 꾸짖으니 일릭카간이 먼저 화의를 제의하고 이세민이 들어줬다고 한다.
* 그는 또 분배에 인색했다 가혹한 세금에 백성은 달아났고 일릭은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중국 측 사료는 가감과 윤색이 있지만, 일릭카간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큰 소득 없이 군대를 돌린 것은 사실이다. 대개 화친으로 얻은 물품은 카간의 손으로 들어가 재분배되지만, 약탈로 얻은 것은 바로 전사들의 것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일릭카간이 군대를 움직이는 데는 기민했지만 잘 나눠주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국 측 연대기에 의하면 ‘서돌궐이 걷은 세금이 너무 혹독하여 칙륵 여러 부족이 떨어져 나갔다’ ‘일릭카간이 명을 듣지 않는 위구르와 설연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627년) 초원에 몇 자나 눈이 쌓여 가축이 몰살당하고 일릭카간이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의 기사들이 끊이지 않는다.
<구당서>는 ‘카간이 폭설로 기근이 들었지만 여전히 여러 부락에서 많이 거두고 부하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린다’고 한다. 628년 돌궐의 변경 약탈은 내부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조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등의 불 끄기식 동원과 이은 실패는 예하 부락의 마음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기사는 629년까지 ‘요새 밖에 있던 중국인이나 여러 호인(胡人) 중 변경 안으로 들어오는 이가 무려 120만에 달했다’는 관리의 보고다. 카간은 키를 잡고 있던 가운데 끼인 백성을 잃고 있었다. 의뭉스럽게도 이세민은 그때도 ‘신의를 지켜 돌궐의 내부 사정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공표했다.
이세민은 허실의 지략가이며 필요하다면 형제도 죽일 수 있는 과감한 사람이다. 530년 재난을 만난 데다 무리가 떨어져나가 어려움에 처한 일릭이 화친을 신청하자 사자를 보내 위로하더니, 막상 일릭이 막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당장 이정(李靖)이 음산에서 일릭의 장막을 급습했다. 이정 막중의 인사가 ‘돌궐 진영에 있는 우리 사자를 버리고 어떻게 공격하는가’ 묻자 이정은 ‘그런 무리들은 아낄 것 없다’며 일언지하에 잘랐다. 어떤 사서는 이것이 이정의 독단적인 판단이라 하지만 이세민의 본심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의 사자가 와 있고 그동안 이세민이 말을 어기지 않은 것에 안심한 일릭은 대비 없이 마음 놓고 있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때는 630년. 돌궐 제1제국은 이렇게 무너졌고, 이어 당의 50년 이상의 기미 지배가 시작된다. 이세민은 ‘천자이자 카간(天可汗)’이 되었고, 중국으로서는 중앙아시아의 곳곳에 기미주(羈州)를 두어 유례없는 간섭을 시작한다. 당시 막남으로 내려온 10만 돌궐 항호는 이동의 자유를 잃고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었다. 50년이 지난 후 돌궐이 부활하자, 그 통치자들은 기미 지배 시절의 통한의 기록을 곱씹는 비문을 여러 개 남기는데 ‘못난 카간’으로 비난하는 이가 바로 일릭카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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